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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일상에서

진실을 보는 안목 없음의 안타까움


  미국의 트럼프가 가짜뉴스 덕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주 지지층이 저학력 저소득 백인 노동자층이라 가짜에 경도되었을 가능성도 있겠으나,

트럼프라는 인물이 지닌 저품격을 불신하는 주류언론의 왜곡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대선에도 가짜뉴스가 횡행했으나 최근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거짓을 참으로 호도하여 반복 확산시키는 가짜뉴스가 안목부재를 부채질하는 상황입니다.


지혜는 고사하고 진실을 보는 작은 안목마저 안드로메다로 보낸 형국이 된 것입니다.


  얼마 전 늦은 밤에 걸어 온 지인의 전화를 받고 진한 안쓰러움을 느꼈습니다.

토지공개념과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현 정부의 문제를 질책하는 부분까지는 이해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지인이 주장하는 근거들이 모두 가짜뉴스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문재인을 이명박과 박근혜와 같은 인물이라고 평하는 부분에서는 아연실색하게 되더군요.

말이 더 이상 필요없는 순간이 있는데요, 그 순간 ‘침묵이 금’이라는 격언이 떠올랐습니다.





  민주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은 국가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의견을 주장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모든 주장은 사실에 근거해야 하며 거짓에 근거한다면 주장은 허공에 맴돌 뿐입니다.


주장이 다를 수는 있으나 틀린 주장을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누구도 설득하기 어렵거든요.


안타깝게도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여 유포하는 자들에게 속임을 당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사기꾼이 사기에 성공하는 것은 대개 사기당하는 자들의 탐욕도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시중 이율보다 훨씬 높은 이자를 준다는 말에 현혹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짜뉴스에 속는 것은 진실을 보는 안목의 부재를 입증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 거죠.





  지인은 그 추운 겨울의 촛불집회에 두 번이나 참가했었기에 안타까움이 더욱 큽니다.

역사를 보면 평생 지켜온 절개나 지조를 세류에 따라 바꾸는 변절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지인의 경우 절개가 강하거나 역사를 보는 안목이 간절했던 사례는 아닐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금 펼쳐지는 적폐청산에 대해 강한 지지자로 남아있기를 주저하지 않았겠죠.


오늘도 퇴근하는 전철역 사거리에는 트럭이 자리 잡고 박근혜 무죄석방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실과 다른 것이 아니라 명백히 틀린 주장을 쏟아내면서 큰 소음을 유발시킵니다.





  그래도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민주주의란 이처럼 다양한 군상들의 집합이기 때문일 겁니다.

다만 거짓의 커튼을 모두 내려 진실의 빛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안타깝습니다.


괴벨스의 술수가 가능했던 것은 거짓 선동에 쉽게 속는 일반대중의 무지함이었을 것입니다.


지인이 가짜의 커튼을 걷고 진실의 빛으로 들어설 수 있을지는 그의 안목에 달린 듯합니다.

촛불집회 참여가 진실이었는지, 가짜뉴스에 황당한 확신을 가진 지금이 진실인지 말이죠.


개인의 사상은 고독한 사색으로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참견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함께 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진실을 보는 안목을 담금질하는 시간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