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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역사사색

박정희 우상화, 호치민이 떠오른다


  우상이란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며 우상화란 그렇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박정희입니다.


18년간의 독재기간동안 박정희의 발길이 닿은 지방마다 다양한 흔적을 기념하고 있는데요,

그의 고향이며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구미가 우상화의 본고장이라 할 것입니다.


구미에서는 매해 박정희 탄신제 등의 행사가 열리고 2011년에는 생가 주변에 6억원의 성금 등으로 제작된 거대한 박정희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박근혜 정권당시에는 '탄신제' 등 박정희 기념사업에 60억여원의 예산이 소요됐다고 하며.

1000억원을 들여 새마을테마공원까지 준공하여 유지비가 시 재정에 부담이라고 합니다.


이러했던 구미시에서 민주당 후보가 시장이 되는 지방선거사상 최대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박정희 기념사업이 시에 얼마다 도움이 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어 지켜볼 일입니다.





  박정희 우상화 보도를 볼 때마다 오래전에 읽었던 [호치민 평전]이 떠오르곤 합니다.

베트남 독립영웅이며 국부로 불리는 호치민은 평생 민족과 국가만 생각했던 인물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하며 강국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승리하는 기적을 이룹니다.

최강대국 미국이 유일하게 패배한 국가가 베트남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월남은 권력자들의 부패로 망했으나 월맹은 청렴한 호치민이 있었기에 끝내 승리할 수 있었던 거죠.

더욱 놀라운 일은 최고의 권좌에 오른 이후에도 평생의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954년 프랑스 총독관저였던 주석궁에 거주한지 3개월 만에 배관공이 살던 집으로 옮겼고

1958년 그 주변에 지은 2층 목조주택으로 옮긴 후 1969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전쟁 중 사망한 그의 유품은 지팡이와 몇 가지 옷, 목민심서 등이 전부였다고 전해집니다.





  반면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18년간 종신독재를 자행한 평생 친일파였습니다.

상상 이상의 비자금을 스위스 은행에 조성했다는 사실이 [프레이저 보고서]로 확인되며,

낮에는 무소불위의 독재를, 밤에는 여성과 양주에 취하며 유흥을 만끽했던 인물입니다.


국민과 국가만을 염려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호치민과는 땅과 하늘 차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호치민 주석을 베트남 국민들이 ‘호 아저씨’라 부르며 따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김일성 우상화를 본 호치민은 개인우상화를 염려하여 묘지를 남기지 말라고 유언했는데요,

당 간부들이 국민 통합을 위해 그의 뜻을 어긴 결과 현재 호치민 영묘가 남아 있습니다.





  반면 박정희는 부마사태 강경진압을 우려한 부하 김재규에게 술자리에서 총살되었습니다.

만약 김재규가 없었다면 박정희는 부산 마산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눴을 것이 분명합니다.

유신으로 종신독재를 행했던 자가 국민의 저항을 총으로 해결했을 것은 짐작 가능하거든요.


호치민과 박정희의 삶을 몇 개만 비교해도 박정희 우상화의 황당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지나치게 과평가 된 박정희의 실상을 눈 밝은 국민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의 세금을 부패한 독재자의 제사에 계속 사용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라고 봅니다.





  베트남 국민이 진정으로 추앙하는 호치민이 남긴 유서입니다.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