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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일상에서

삶, 그리고 죽음


  얼마 전 지인의 모친이 갑자기 삶과 이별하셨습니다.

부음을 듣고 가족의 충격이 매우 크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치매와 노환으로 수년간 고생하시기는 했으나,

급작스런 이별을 예상할 만한 병세는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별의 아픔은 온전히 남은 자의 몫이 됩니다.


지인들의 위로는 약간의 도움이 될 뿐,

가장 근본적인 위안은 시간이 슬픔을 보듬어 준 후가 되겠지요.


  이처럼 태어난 모든 생명의 종착점은 죽음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기간이 다를 뿐 모두가 시한부생명이거든요.


부처님의 예화처럼 삶의 꿀맛에 빠져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죽음보다는 눈앞의 삶에 바빠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과연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로 보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삶과는 너무도 다른 죽음을 생각하는 것에 대한 근원의 공포가 있습니다.





  삶속에서는 뭔가를 선택할 수 있으나 죽음은 삶의 끝이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말이죠.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살면서 내면에 쌓아 온 철학의 두께가 맡게 되겠지요.


예전 호스피스 환자를 돌본 이가 저술한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살면서 정신적으로 여유롭게 산 사람은 죽음의 과정에서도 여유롭다‘


선택하는 삶이 선택당하는 삶보다 아름다운 것처럼 선택하는 죽음의 과정도 아름답습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춤추게 하는 것처럼 삶이 자아를 춤추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삶에 연연하여 각종 연명치료로 연장하는 삶의 방식이 전혀 현명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가 중요한 순간입니다.

언젠가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불필요한 탐욕에 몰입할 이유가 없거든요.


지인 모친이 레테강을 건너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남은 이들이 생각할 겨를은 없을 겁니다.

충격과 슬픔속에서도 계속되는 일상처럼 생과 죽음은 늘 그렇게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는 늘 행복하시기를 지인 모친의 명복을 간절히 빕니다.


  지구의 하루가 3시간이었던 그 먼 시절부터 24시간이 흐르는 지금 이 시간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생명들은 태어나 스러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정해진 생명의 규칙 앞에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는 점에서 삶의 성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택하는 삶, 선택하는 죽음을 위해 현재의 삶을 더욱 현명하게 살아내야 할 이유입니다.





  어느덧 1 주기가 다가오니 영면하신 모친이, 모친에 대한 기억이 더 자주 떠오릅니다.

효도한 부분보다는 불효한 부분만 동영상처럼 재생되니 그저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계실 때 잘해야 한다는 옛사람들의 뉘우침이 새록새록 되새겨지는 나날입니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가?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현존하지 않으며,

죽음이 현존할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