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인/일상에서

아파트에서 생긴 일 3 화 - 관리소 직원의 이중생활

 

  한 대학생이 칼 세이건에게 물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게 되면 어떤 의미가 남습니까?"

 

칼은 그 학생을 쳐다본 후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하세요."


 

  공동주거공간인 아파트에는 입주민이 직접 관리할 수 없는 복도나 계단, 펌프등 공용부분이 존재합니다.


입주민의 전용공간인 세대부분은 주민이 사용하면서 자체적으로 관리하게 되지만,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설이나 펌프등의 공용설비등을 관리하는 역할은 관리사무소가 담당합니다.


때문에 관리사무소 직원의 존재근거는 세대외의 공용부분이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일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정화조 청소가 끝난 지 얼마 후 펌프실에 머물러야 할 설비기사가 갑자기 사무실에 들어 왔습니다.
주머니를 뒤지더니 뭔가를 꺼내어 책상위에 놓는데 만원짜리 두 장이더군요.

 

"이게 무슨 돈이에요?"
"이번에 00호 보일러 교체공사를 했는디 소장님 쓰시지라."


"예?"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놀라며 반문하니 슬며시 인사하며 나가버립니다.

너무 황당해서 경리를 쳐다보았더니 별 일 아니라는 듯 웃더군요.

 

"원래 관리소 직원은 업무시간중에 세대일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된 거죠?
"이 아파트 관행이에요. 보일러가 고장나면 주민들이 관리소 직원에게 부탁해 왔어요."

 

"설비기사가 두고 간 돈은 뭐죠?"
"기사님이 세대공사를 하면 수고비를 받아서 절반을 소장님에게 주셨어요."


"헐~"


 

  세대에서 보일러교체를 요청할 경우 직원이 일정한 수고비를 받고 해 왔다는 것이 관행이라네요.
수고비는 설비기사와 소장이 반씩 나눠서 써왔고 이번에 그 부분을 드린 거라고 하더군요.

 

 

 


  바로 이 돈이 지난번 정화조 청소 후 총무가 말했던 '기타 금액'의 정체였던 거죠.

 

업자도 아닌 직원이 돈을 받고 근무시간에 세대일을 해 왔다는 것도 무척 놀라운 일인데,
그렇게 일해서 받은 수고비를 소장과 기사가 나눠 왔다니 복마전도 이런 경우가 있을까 경악하게 되더군요.


 

  창문 밖 놀이터에는 환한 표정의 어린이들이 놀고 있는데 어른들 세상은 참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리소 직원이 세대일 하는 것을 원칙에 어긋난다며 금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외부업자에게 의뢰할 때보다 훨씬 저렴하게 교체해 왔던 주민들의 반대가 심할 것이 뻔했습니다.
개혁은 개혁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명분은 물론 실리에서도 앞서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금지한다면 명분은 있겠지만 주민에게 물적피해가 가므로 실리는 전혀 없는 일이 되겠더군요.

 

깊이 고심한 끝에, 설비기사가 소장 몫의 수고비를 가지고 오면 경리가 보관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일종의 직원기금을 조성하여 연말 회식비등 직원 사기진작용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한 거죠.
아파트 관리비내역을 보면 급여외에는 직원들의 복리후생비로 사용할 수 있는 항목조차 없었거든요.

 

 

  결국 주민과 직원들의 이익을 위해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기'로 오래된 관행과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모아 진 소장몫의 수고비로 더운 여름에는 직원들이 일할 때 시원한 음료수도 사 줄 수 있었고,
연말에는 1 년 동안 수고한 직원들의 노고에 화답하는 의미로 근사한 회식을 해 줄 수 있었죠.

 

그럼에도 개혁은 시도조차 못해 보고 잘못된 관행에 눌려버린 어설픈 자신이 낯선 타인처럼 보였습니다.
주민과 직원에게 의미있는 일이 자신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린 현실이 몸살을 앓게 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