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황희가 청백리의 표상이 된 것은 그 누구에게도 뇌물을 받지 않고 일한 댓가로만 살았기 때문이다.
알량한 지위에만 오르면 양심불문하고 재산을 챙기던 대부분의 관료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때문에 여름에 장마가 지면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앉아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할 정도로 집이 허름하였고,
본인의 죽음후에는 딸들이 상복을 살 돈이 없어 한 벌을 찢어서 입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상적인 시설점검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가장 중요한 업무중의 하나입니다.
주로 겨울철에 화재가 많이 발생하므로 평소 점검과 별도로 가을철에 전체점검을 하게 됩니다.
점검결과 소방시설이 매우 노후되어 작동조차 되지 않아 모든 시설을 완전히 교체해야 할 상황이더군요.
문제는 재건축을 추진하는 아파트라서 교체비용도 거의 없지만 할 의지도 전혀 없다는 점이었죠.
왜냐하면 재건축조합을 결성하여 재건축을 논의하는 오래된 아파트의 최우선순위는 오직 재건축이거든요.
어느날 점심시간이 가까울 때쯤, 관할 소방서에서 점검을 나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문제많은 소방시설의 관리책임자로서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총무님! 소방서에서 나오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텐데 어떻게 처리했었나요?"
"소방서에서 나올 때마다 전 소장님이 봉투를 주셨어요.
그러면 별다른 문제없이 조용히 넘어가데요."
'뇌물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는 가치관이 기가 찬 물살에 흔들리는 순간이었지요.
이미 정화조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셈이니 가치관은 오염되었지만 그래도 자존심은 남았거든요.
만약 소신을 지키려고 봉투를 주지 않는다면 소방서로부터 개보수명령서가 내려올 것이고,
일부러 보수하지 않고 있는 주민과 대표들은 소장이 처리(?)를 못해서 상황이 커졌다고 할 게 뻔했죠.
부담은 컸지만 일단 원칙적인 방향으로 대화를 나눠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 아파트는 재건축을 추진중이라 보수비도 없고 주민들도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일부 소화기를 충약해서 초기진화에 주력하는 선에서 합의하여 관리중이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고충은 이해하지만 우리도 업무원칙이 있으니 일정 부분은 보수하셔야 합니다."
"아파트 주민입장에서는 보수보다 재건축이 우선이므로 특별한 상황으로 처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모든 소방시설이 노후된 상태지만 전면적 보수는 우리 아파트의 특수한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아파트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현 상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것이 우리 입장입니다."
서로 평행선을 걷는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와 가슴으로는 처리여부를 고심하고 있었죠.
결국 원칙을 외면하고 뇌물을 줘서 아파트가 평안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더군요.
이런 일로 사표를 낸다면 너무 치기어린 행동이었다고 나중에 후회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가치관을 실현하는 일과 현실의 부정한 일면을 가슴깊이 느낀 사건으로 기억되는 장면입니다.
비상금을 봉투에 넣어 상급자에게 건네주니 단 한번의 의례적 거부도 없이 너무도 당연하게 받네요.
뇌물을 일상적으로 받아왔던 사람의 아주 자연스런 처세가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람들, 안 줬으면 큰일 날뻔했네. 하필 점심시간전에 온 것도 그렇고..'
재건축때문에 보수를 할 수 없는 오래된 아파트의 약점을 이용해서 뇌물을 챙겨 온 그들과,
어쩔 수 없는 입장에 몰려 약간의 뇌물로 해결해야 했던 오랜 관행을 이행한 자신이 매우 한심했습니다.
그 사건은 얼마 후 해당 아파트를 떠나게 된 두 가지 원인중의 하나가 됩니다.
언제든 찾아 올 그들에게 또 뇌물을 건넨다는 것은 더 이상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죠.
또한 언제 파열될 지 모르는 수도관을 보수조차 하지 않는 주민들을 설득하기에도 지쳐가고 있었지요.
요즘은 공무원들의 청렴도가 예전보다는 높아졌다고 하지만 국가 청렴도 순위를 보면 아직도 멀었더군요.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2011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우리나라는 183개국 중 43위를 차지했거든요.
'왜 인간의 악한 본질을 인간이 원숭이로 지내던 저 옛날의 특징으로 한정하고,
선한 본질만이 오직 인간적인 특징이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왜 인간은 다른 동물과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고상한' 본질을 찾으면 안된단 말인가?'
- 스티븐 제이 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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