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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역사사색

베트남과 호치민

 

  현재 베트남은 한국 결혼이민이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지난 3월 경북도 조사에서도 이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요,
경북지역에 사는 결혼이민자 10명 중 4명이 베트남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더군요.

 

많은 베트남 여성이 결혼이민 오는 것만 보고 그저그런 나라로 여기는 분들도 계실텐데요,
베트남은 약소국으로서는 보기드문 대단한 자부심과 강한 민족성을 가진 국가입니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굴하지 않고 이겨낸 의지의 역사를 가진 나라거든요.

 

천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고 끝내 이겨냈지만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불운한 나라였고,
제2차 세계대전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일본이 패망후

프랑스와 벌인 8년간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기쁨도 잠시, 프랑스의 뒤를 이어 베트남의 독립을 막고 나선 미국에 맞서 끝내 이겨낸 대단한 나라죠.

 

때문에 베트남관련 소식을 들을 때마다 베트남의 독립역사와 국부 호치민이 떠오릅니다.

 

 

 

 

베트남 공산당의 창건자로서 해방된 조국의 주석, 전략가이며 민족통합, 민족 해방의 상징으로서
소박하고 온화한 지도자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으로 반은 레닌이고 반은 간디로 평가받는 인물이거든요.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호치민은 가명이며 본명은 응우옌 신꿍이라고 합니다.

 

호치민은 1940년 중국 기자로 활동할 때 썼던 필명으로 전해지는데요,
윌슨대통령에게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보낼 정도로 젊은시절부터 용기가 대단했으며,
양심적인 지식인들을 만나 사회주의운동에 몸담게 된 이후 독립을 향한 가열찬 삶을 살게 됩니다.

 

 

 

 

  현재 베트남의 수도인 호치민시는 예전에 사이공으로 불리던 남베트남의 수도로서,
1975년 북베트남에 의해 통일되면서 국부의 이름을 따서 개명된 도시입니다.

 

베트남 독립영웅인 호치민은 20세기 최강대국 미국과 싸워 승리한 유일무이한 지도자인 동시에,
평생을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자신을 바쳤고 권력위에서도 청렴결백했다는 점에서도 매우 독보적입니다.

 

79년의 삶을 독신으로 살면서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나 안락함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국민과 함께 땀 흘리고 낡은 외투에 닳은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오직 서민들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호 아저씨'로 불린 그는 노인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게 됩니다.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총리와 초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미군이 베트남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즈음인 1969년 9월 2일,
24번째 독립선언 기념일을 앞두고 폐결핵 투병중이던 호치민은 79세 되던 해에 사망합니다.

 

평생을 애써 온 조국의 완전한 해방을 못보고 눈을 감은지 6년 후인 1975년 4월 30일,
마침내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성립되어 베트남은 통일국가가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베트남 국민 수백만명이 삶의 대열에서 내려야만 했습니다.

 

  간디처럼 무소유로 살면서 유산으로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던 정치가 호치민!

 

 

 


  권력자가 아닌 친근한 이웃 '호 아저씨'의 이미지를 그대로 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베트남인에게 존경받는 국부로, 지난 40년은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남을 듯 합니다.

최강대국과 험난한 전쟁을 벌이면서도 베트남이 끝내 승리할 수 있었던 버팀목이었기 때문이죠.

 

'권력을 통해 어떤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작은 안락조차 추구하지 않았던 지도자'로 세계가 극찬했지만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호치민은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베트남은 공산당이 유일정당인 사회주의공화국으로서 지구상에 몇 안남은 공산주의 국가거든요.
북한의 김씨공산왕조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을 곱게 보기는 어렵겠지요.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호치민은 사상의 차이를 넘어 추앙받아 마땅한 지도자라는 점입니다.
그가 남긴 유언만 봐도 '세상에 이런 정치가도 있었구나' 정말 부럽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거든요.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호치민의 묘소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전쟁후 재건과정에서 당연히 필요했겠지만,
후계자들이 관례에 따라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박제했고 바단광장에 있는 그의 묘소는 성역이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6.4 지방선거를 하게 되는데요, 호치민의 강렬한 조국애만큼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주석궁이 아닌 정원사의 숙소에서 생활할 정도의 청렴결백까지는 감히 바라지도, 바랄 수도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