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이 책을 서가에서 다시 꺼내게 된 것은 순전히 박근혜 후보 때문입니다.
지난 10일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주장을 보고 이 책이 생각났거든요.
"5.16과 유신은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된다는 생각"이라며 기존의 입장을 반복했더군요.
자신의 부친 박정희가 저지른 5.16과 유신에 대해 본인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역사에 공을 넘긴 셈이지요.
역사가 지갑에 넣어 마음내키는대로 사용할 수 있는 지폐도 아닌데 마구 남용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영국의 외교관과 대학교수,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E.H.카의 강연을 6장으로 묶어 낸 책입니다.
1961년 1월에서 3월까지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책과 같은 제목으로 연속 강연한 내용을 가을에 출판했지요.
출간된지 벌써 50년이 넘었지만 세계적 베스트셀러로서 유명대학들의 권장도서로 추천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가장 유명한 역사 입문서로서 역사학도는 물론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이책을 읽어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한번쯤 들어봤거나 기억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그렇다면 역사란 과연 무엇일까요, 책임을 회피하거나 진실한 대답을 하기 어려울 때 떠맡기는 위탁소일까요?
저자는 "역사는 과거와 미래사이의 일관된 연관성을 수립할 수 있을 때만 의미와 객관성을 갖게 된다고 봅니다.
역사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자연적 과정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의식적으로 관련하고,
또 인간이 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특수한 사건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부르크하르트의 말처럼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속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관한 기록이죠.
특수한 사건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하지 못한 일이 아닌 이룩해 낸 성취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역사입니다.
또한 역사는 전통의 계승과 함께 시작되고 전통은 과거의 관습과 교훈을 미래속으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기록이 보존되고 획득된 기술이 전승되는 것은 미래의 세대를 위한 진보가 되어야 합니다.
즉 역사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려면 과거의 잘못을 반드시 평가하고 비판하여 정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5.16이나 유신은 주목할 만한 사건일 수는 있지만 역사적 비전으로 보면 단죄의 대상이 돼야 합니다.
다수 증언과 상황을 볼 때 5.16은 불법적인 쿠데타이며 유신은 종신독재를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지요.
저자는 "역사가의 임무는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있었던 일'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즉 잘못된 역사를 그냥 기록만하고 회피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평가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거죠.
때문에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역사가와 국민의 평가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에 대한 평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없이는 절대로 올바른 미래가 펼쳐질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물론 같은 역사적 사건이라도 가치관과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보는 관점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명백한 것은 민주와 인권, 역사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날카로운 비판은 언제나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개발독재가 자행한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향한 국민의 도전은 계속 되어야 하거든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가 역사"라는 유명한 구절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간의 단절이 아닌 상호관계를 통해 올바른 미래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 책은 단순한 역사입문서라기보다는 역사철학서로 볼 수 있을 정도이므로 읽기 쉬운 내용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스테디셀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독할 만한 양서임은 분명하지요.
역사가 무엇인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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