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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더불어삶

밥그릇싸움, 이 개들을 보라~


  때때로 자신의 삶, 사회를 제 3의 시각으로 보는 것을 즐깁니다.

밀집된 숲과 같은 사회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전체 숲을 보는데요,

새로운 깨달음이 느껴질 때가 많아서 참 재미있습니다.


인간사회를 가장 단순화시켜 보면 밥그릇싸움의 현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생명체라는 점에서 극히 당연한 현상인데요,

문제는 지나친 탐욕이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는 거죠.


당장 먹을 음식이 넉넉해도 추가로 저장하는 습성을 가진 동물이

그 많은 동물중에서 개미와 인간종 둘 뿐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저장본능이 부자와 빈자를 만들고 강화시킨 반면 나눔을 가뭄에 들게 해 왔지요.


그럼에도 일용할 양식은 모든 인간에게 두루 주어져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구촌의 현실은 늘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부자나라에서는 음식물쓰레기가 넘치고 빈국에서는 굶어 죽는 이들이 여전하거든요.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진 자, 부자국가들이 더 나누고 베푼다면, 빈국의 국민들이 아사하는 일은 드물겠지요.


한 국가안에서도 상위 1%가 99%보다 더 많은 부를 갖고 있습니다.

물질우선의 자본주의경제라 해도 부의 치우침이 극한에 이른 상황이라는 점에서,

더불어 사는 공정한 삶을 위해 반드시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세상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이죠.


부처님이나 예수님같은 성인이 아닌 인간에게 그의 밥그릇까지 달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자기의 밥그릇을 넘어 남의 밥그릇까지 챙기려는 것만큼은 절대 안된다는 거죠.





자제해야 할 과도한 탐욕이 자본주의의 이익추구라는 커튼에 가려 당연시되고 있기에,

갈수록 빈부격차는 커지고 더불어 행복한 사회라는 이상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개가 밥을 먹을 때는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개들의 사회에서도 임신한 개나, 강아지등 약자에게는 음식을 양보할 줄 압니다.

변하기 전의 스크루지영감 같은 인간보다는 훨씬 나은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베풀면 고마워 할 줄 알고, 약자에게 나눌 줄도 안다는 점에서 ‘개’라는 단어를 욕설에 자주 사용하는 것은 안되는 일이죠.

유사이래 해 온 밥그릇싸움,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에 앞으로도 계속 될 텐데요,

최소한 지금처럼 과도한 탐욕으로 치닫는 일만큼은 반드시 개선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총선을 앞둔 우리나라 정치권에서는 밥그릇싸움이 한참입니다.

말로는 국민, 국가를 입에 담지만 대부분 자신의 밥그릇이 최우선으로 보입니다.

보다 이타적인 정치인을 선별하는 국민들의 안목을 이번 선거에서는 꼭 보고 싶습니다.